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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생인권조례에서 서이초까지, 진보 교육 운동의 역설 — 1편

교육&철학

by by Noma 2026. 5. 28. 0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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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하나의 아이러니

2023년 여름, 서울 서초구의 한 초등학교 교사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 죽음이 공론화되었을 때 가장 먼저 도마 위에 오른 것은 학생인권조례였다. 악성 민원이 교사를 죽음으로 몰았고, 그 민원이 가능했던 법적 토양이 학생인권조례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조례를 가장 열심히 만들고 지지했던 것은 다름 아닌 교사들, 더 정확히는 진보적 교사 운동이었다. 교육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사람들이 만든 제도가, 교사를 죽음으로 몰아가는 구조의 일부가 되었다는 이 역설. 그리고 지금 2026년,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 보수 후보들은 이때다 하고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이 장면은 한국 교육 개혁의 철학적 공백을 정확하게 가리킨다. 진보는 자신이 만든 제도의 부작용 앞에서 침묵했고, 보수는 그 부작용을 정치적으로 활용하면서 폐지를 답으로 제시한다. 그러나 진보의 침묵도, 보수의 폐지론도 진짜 문제를 건드리지 않는다. 문제는 학생인권조례가 아니라, 그것이 채택한 언어에 있기 때문이다.


전교조는 왜 학생인권을 요구했는가: 지워진 맥락

1989년 5월 28일,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창립되었다. 당시 교육 현장의 실상을 기억해야 한다. 체벌은 일상이었다. 교사가 학생을 때리는 것은 교육의 일부로 여겨졌고, 그것을 문제 삼는 것이 오히려 이상한 시대였다. 촌지는 관행이었으며, 강제 보충수업과 야간자율학습은 학생의 시간과 신체를 국가와 학교가 임의로 처분할 수 있다는 전제 위에서 작동했다. 학생은 교육의 대상이었지, 권리를 가진 주체가 아니었다.

전교조가 학생인권 향상을 요구한 것은 이 현실에 대한 정당한 응답이었다. 체벌 금지, 강제 야간자율학습 폐지, 두발의 자유. 이것들은 단순한 규범 변화가 아니라, 군사독재 시절부터 이어진 권위주의 교육 문화와의 결별 선언이었다. 2010년 경기도에서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공포되었을 때, 그것은 오랜 싸움의 결실이었다.

이 맥락을 지우고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는 것은 공정하지 않다. 학생인권조례가 없었다면 지금도 교실에서 매를 드는 교사가 있었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러나 이 맥락만 보고 그 결과를 외면하는 것 역시 정직하지 않다.


권리의 언어로 설계된 조례: 무엇이 빠졌는가

6개 시도의 학생인권조례를 분석한 연구에 따르면, 학생의 권리를 보장하는 조항은 평균 19개인 데 반해 학생의 의무를 규정한 조항은 평균 1개에 불과하다. 이 비대칭이 이미 구조적 문제를 예고하고 있었다.

권리의 언어는 본질적으로 대립적이다. 권리는 누군가에 대해 주장되는 것이며, 그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잠재적 가해자가 설정된다. 학생의 권리를 침해할 수 있는 존재는 자연스럽게 교사로 설정된다. 이 구도가 조례 안에 내장되었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을 성인 시민과 동일한 권리 주체로 설정했다. 그런데 교육 관계는 성인 시민 간의 대등한 관계가 아니다. 교육 관계는 본질적으로 비대칭적이다. 교사는 학생보다 더 많이 알고, 더 많이 경험했으며, 바로 그 비대칭성 때문에 교육이 가능하다. 교사가 학생에게 "지금은 이것을 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 말을 뒷받침하는 경험과 판단이 있기 때문이다.

권리의 언어는 이 비대칭성을 불평등으로 읽는다. 그리고 불평등은 교정되어야 한다. 이 논리 위에서 교사의 교육적 권위는 잠재적 억압이 되고, 학생을 지도하는 행위는 잠재적 침해가 된다.

여기서 결정적인 구분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권위주의와 교육적 권위는 다르다. 전자는 강제와 공포에 기반하고, 후자는 전문성과 신뢰에 기반한다. 군사독재 시절의 체벌과 강압이 권위주의라면, 교사가 학생의 미래를 위해 지금 불편한 것을 요구하는 것은 교육적 권위다. 학생인권조례는 전자를 해체하는 과정에서 후자까지 함께 흔들었다. 이 결정적 구분이 법제화 과정에서 충분히 반영되지 않았다.


진보 교육 운동의 내적 모순: 두 목표의 충돌

전교조와 진보교육 진영은 두 가지 목표를 동시에 추구했다.

하나는 권위주의적 교육 문화의 해체다. 체벌 금지, 두발 자유, 강제 보충수업 폐지. 교사의 강압적 권력을 제한하는 방향이다. 다른 하나는 교사의 전문성과 교육 자율성 확보다. 교원평가 반대, 성과급 반대, 교사의 교육적 판단 존중. 교사의 전문적 권한을 강화하는 방향이다.

이 두 목표는 긴장 관계에 있다. 교사의 권력을 제한하면서 동시에 교사의 전문적 권한을 강화하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 학생인권조례는 전자를 법적으로 구현했다. 그러나 교사의 교육적 판단을 보호하는 법적 장치는 충분히 만들지 않았다. 권리만 법제화되고, 그에 대응하는 교육적 권한이 법적으로 보호받지 못했을 때, 균형은 한쪽으로 기울 수밖에 없었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권위주의 교육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진보 교육 운동은 교육적 권위 자체에 대해 충분히 생각하지 않았다. 권위주의를 해체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그 자리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에 대한 교육철학적 비전이 부재했다. 체벌 없는 교육, 강제 없는 교육이 필요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그렇다면 교육적 권위는 어디서 오는가, 교사와 학생의 관계는 어떤 언어로 재구성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답이 없었다.

서이초 사건 이후 이 공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진보교육 진영은 학생인권조례가 교육 현장에 미친 영향을 직시하고 대안을 제시하기보다 "학생인권과 교권은 상호 보완적이다", "학생의 인권이 보장되어야 교권도 보장된다"는 원론만 반복했다. 조례의 실질적 효과를 검토하고 수정을 논의하기보다, 조례 수호에 집중했다. 학생인권조례를 비판하면 곧 보수 진영의 손을 들어주는 것으로 읽히는 정치적 구도가 자기 성찰을 가로막았다.


아동학대법의 적용: 결정적 전환점

학생인권조례만으로는 지금의 상황이 만들어지지 않았다. 결정적 전환점은 아동학대처벌법이 교육 현장에 광범위하게 적용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동학대처벌법은 가정 내 아동 학대라는 심각한 사회 문제에 대응하기 위해 만들어진 법이다. 그 취지는 정당하다. 그런데 이 법이 교육 현장에 적용되면서 교사의 정당한 생활지도 행위가 아동학대 혐의의 대상이 되었다. 생활교육위원회 소집이 협박이 될 수 있다. 수업 중 분리 조치가 학대가 될 수 있다. 훈육의 언어가 정서적 학대로 고소될 수 있다.

숫자가 이것을 확인해준다. 2023년 9월부터 2025년 8월까지 교육감이 정당한 생활지도로 판단한 1,023건 중 경찰 단계에서 수사 개시 전 종결된 사례는 16%에 불과했다. 나머지 857건은 정식 입건되어 수사를 받았다. 교육감이 정당하다고 판단해도 교사는 수사를 받아야 한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교사가 교육적 판단을 내리는 순간, 그것이 범죄 혐의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이 구조 안에서 교육적 사명감은 존재할 수 없다. 불가능하다. 지도하지 않는 것이 고소당하지 않는 가장 확실한 방법이 될 때, 교사는 교육의 주체가 아니라 피해자의 위치에 서게 된다. 이것은 개인의 의지 문제가 아니라 구조가 강제하는 귀결이다. 소풍이 사라지고, 축구가 금지되고, 생활지도가 범죄 혐의가 되는 교실은 바로 이 구조의 결과다.


법원의 철학적 부재: 교육을 심판한 언어

속초 현장체험학습 사고 판결, 교육감이 정당한 생활지도라는 의견을 제출해도 계속되는 수사. 이 법적 구조들이 공유하는 하나의 전제가 있다. 교육 행위에는 고유한 판단 기준이 없다는 것이다.

법원은 교사를 일반 시민과 동일한 주의 의무 기준으로 판단했다. 그 순간 교육적 판단은 일반 과실의 하위 항목이 된다. 소풍을 간 것이 교육적으로 필요한 판단이었다는 것, 학생을 분리 조치한 것이 교육적으로 정당한 행위였다는 것. 이것들은 법적 판단의 기준이 되지 않는다. 법은 묻는다. 합리적인 성인이라면 그 순간 어떻게 했겠는가. 교육적 행위의 고유한 논리는 이 질문 안에 들어올 자리가 없다.

의료에는 의료적 표준(medical standard)이 있다. 의사가 수술 중 불가피한 판단을 했을 때, 법원은 의료 전문가 공동체의 기준으로 심사한다. 일반인의 상식이 아니라 전문가 집단의 규범이 판단 기준이 된다. 교육에는 이에 해당하는 '교육적 표준'이 없다. 아니, 없다고 사법부가 판단해온 것이다.

이것이 법조인들의 철학적 부재다. 교육 행위가 일반적인 과실 행위와 다른 고유한 논리를 갖는다는 것, 교육적 판단은 현재의 불편함이 아니라 미래의 가능성을 향한다는 것, 그 판단이 때로 위험을 감수하고 실패를 허용하는 것을 포함한다는 것. 이 교육 고유의 논리를 법적 판단에 반영하려는 시도가 충분하지 않았다. 교육은 법적 관계의 하위 항목일 뿐이라는 전제가 판결 속에 암묵적으로 작동했다.


학생인권조례 폐지가 답인가: 잘못된 처방

서이초 사건 이후 보수 진영은 학생인권조례를 교권 추락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폐지를 요구했다. 2024년 충남에서 전국 최초로 폐지안이 가결되었고, 서울시의회도 2025년 12월 폐지안을 가결했다. 지금 진행 중인 서울시교육감 선거에서도 보수 후보들은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핵심 공약으로 내세우고 있다. 책임 없는 권리만을 강조하는 조례를 전면 폐지하고 권리와 의무를 함께 담은 새로운 조례를 만들겠다는 것이다.

진단은 절반쯤 맞다. 학생인권조례가 권리만 강조하고 의무를 경시했다는 지적은 정확하다. 앞서 살펴본 것처럼 권리 조항 19개에 의무 조항 1개라는 비대칭이 실제로 문제였다. 그러나 처방은 세 가지 이유에서 틀렸다.

첫째, 폐지는 원인을 제거하지 않는다. 교육의 사법화를 가능하게 한 구조는 학생인권조례만이 아니다. 아동학대처벌법의 적용 방식, 법원의 판단 기준, 국가의 책임 회피 구조. 이것들이 함께 작동한 결과다.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해도 아동학대법은 그대로이고, 법원의 판단 기준은 바뀌지 않으며, 교사에게 책임을 떠넘기는 국가의 구조도 변하지 않는다.

둘째, 폐지는 학생인권조례가 없애려 했던 문제들을 되살릴 위험이 있다. 서울 학생인권조례는 성별·종교·출신·언어·장애·성적 지향 등을 이유로 한 차별을 금지하고, 체벌·따돌림·집단 괴롭힘·성폭력 등 각종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를 명시하고 있다. 이것들이 사라지면 어떻게 되는가. 체벌이 당장 돌아오지는 않더라도, 차별과 폭력에 대한 제도적 보호 장치가 약화된다. 조례가 보호했던 가장 취약한 학생들이 가장 먼저 피해를 입는다.

셋째, 그리고 가장 중요하게, 폐지는 같은 언어 안에서 이루어지는 대립이다. 학생인권조례의 문제가 권리의 언어로 교육 관계를 재편한 것이라면, 그것을 폐지하고 새로운 조례를 만드는 것도 여전히 권리와 의무의 언어 안에 머문다. 보수 진영이 제안하는 '학생권리의무조례'도 권리와 의무의 계산이지, 교육 고유의 언어가 아니다. 학생 권리 대 교사 권리, 혹은 학생 권리 대 학생 의무라는 대립 구도를 해소하는 것이 아니라 그 구도 안에서 다른 계산을 하는 것일 뿐이다.

진보의 침묵과 보수의 폐지론은 겉으로는 대립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같은 언어 체계 안에 갇혀 있다. 양쪽 모두 교육 관계를 권리의 언어로 이해하고 있으며, 그 언어 안에서 어떤 권리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를 다투고 있다. 진짜 물음은 그 밖에 있다. 교육 관계는 권리의 언어로 충분히 포착될 수 있는가.


교육은 권리 이전의 문제다

교육은 권리의 문제이기 이전에 관계의 문제다. 그리고 그 관계는 고유한 언어를 필요로 한다.

교육 관계에서 교사와 학생은 대등한 권리 주체가 아니다. 그러나 그 비대칭이 억압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를 생각해보라. 부모는 아이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아이에게 불편한 것을 요구할 때가 있다. 그것이 권리의 침해인가, 아니면 사랑과 책임의 표현인가. 물론 이 비유는 완전하지 않다. 교사는 부모가 아니고, 학교는 가정이 아니다. 그러나 이 비유가 가리키는 것이 있다. 비대칭적 관계가 반드시 억압적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그 관계를 권리의 언어로만 규율하면 그 안에 있는 신뢰와 책임의 구조가 사라진다는 것이다.

듀이(John Dewey)는 교육을 '경험의 연속적 재구성'이라고 했다. 이 정의에서 교사의 역할은 그 재구성을 안내하는 것이다. 안내자는 안내받는 사람과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다. 그러나 안내자는 안내받는 사람을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돕는다. 이 관계를 권리의 언어로 포착하려 하면, 안내자의 역할 자체가 사라진다. 안내받는 사람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잠재적 가해자가 될 뿐이다.

교육 관계에는 교육의 언어가 있어야 한다. 그것은 권리의 언어도 아니고, 의무의 언어도 아니며, 사법의 언어는 더더욱 아니다. 교사와 학생이 비대칭적이되 신뢰에 기반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언어, 교육적 판단이 법적 안전보다 앞설 수 있는 언어, 실패와 위험을 교육의 일부로 인정하는 언어. 이 언어를 찾는 것이 지금 교육철학이 해야 할 일이다.


마치며: 해체 이후의 물음

권위주의적 교육에 맞섰던 운동의 역사적 공과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그 운동이 없었다면 지금의 교실은 더 폭력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공과를 인정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 한계를 직시하는 것이기도 하다.

권리의 언어는 파괴의 언어로는 유효하다. 부당한 권위를 해체하는 데 효과적이다. 그러나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언어는 아니다. 해체 이후에 무엇을 세울 것인가. 이 물음에 답하지 못한 채 법제화만 이루어졌을 때, 그 공백을 채운 것이 사법화였다.

진보는 공백을 방치했고, 보수는 그 공백을 폐지로 메우려 한다. 그러나 폐지는 다른 공백을 만들 뿐이다. 필요한 것은 학생인권조례의 폐지가 아니라, 그것이 채택한 언어의 한계를 인식하고 교육 고유의 언어를 새롭게 구성하는 것이다. 학생도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가지며, 교사도 교육적 판단의 주체로서의 권위를 가진다. 이 두 가지를 동시에 담을 수 있는 언어. 그것이 무엇인지는 아직 충분히 묻지 않았다.

그런데 이 언어를 찾는 일이 가능하려면, 그 언어를 말할 수 있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가져야 한다. 교육 현장의 전문가들이 교육 입법에 실질적으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한국의 교사는 지금 그 목소리를 구조적으로 박탈당하고 있다. 이것이 2편의 출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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