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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사태로 바라본 한국의 혐오문화-2편

교육&철학

by by Noma 2026. 5. 25. 0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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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우리는 이미 이 질문을 알고 있다

스타벅스 사태가 터진 직후, 반응은 빠르게 두 갈래로 갈렸다. 한쪽은 처벌을 요구했다. 5·18 역사왜곡에 대한 처벌법을 강화하고, 일베 같은 혐오 사이트를 폐쇄하며, 기업의 책임을 법으로 묻자는 방향이었다. 다른 한쪽은 교육을 말했다. 역사 교육이 잘못되었고, 시민 의식이 부재하며, 세대 간 소통이 단절되었다는 진단이었다.

낯설지 않은 대화다. 혐오 표현이 사회 문제로 부상할 때마다 처벌 강화와 교육 개선이 해법으로 제시되었고, 매번 사태는 잠시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가 다른 형태로 다시 떠올랐다. 왜 반복되는가. 1편에서 분석한 세 가지 토양, 즉 민주화 서사의 피로, 능력주의적 분노, 온라인 증폭 장치는 그 어느 처방도 건드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 글은 해답을 제시하려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익숙하게 내놓는 해법들이 실제로 무엇을 건드리고 무엇을 건드리지 못하는지를 먼저 들여다보고자 한다. 그 과정에서 우리가 아직 제대로 묻지 않은 질문이 무엇인지가 드러날 것이다.


사이트를 닫으면 혐오도 닫히는가

이재명 대통령은 스타벅스 사태 직후 일베 등 혐오 사이트의 폐쇄를 검토해야 한다고 밝혔다. 직관적으로 납득 가능한 반응이다. 혐오를 생산하는 공간을 없애면 혐오가 줄어들 것이라는 논리다.

그러나 혐오 콘텐츠의 생태계는 이미 특정 사이트에 국한되어 있지 않다. 유튜브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영상, 틱톡의 짧은 밈, 오픈 카카오톡 채팅방. 일베가 폐쇄된다고 가정하더라도, 그 이용자들과 그들이 생산하는 문화 코드는 텔레그램, 디스코드, 각종 커뮤니티로 분산될 뿐이다. 플랫폼은 이동한다. 그리고 더 결정적으로, 혐오 코드는 이미 오프라인에 침투해 있다. 교실에서, 군대에서, 직장의 메신저에서. 온라인 플랫폼을 규제한다고 해서 이미 또래 문화로 정착한 언어와 감각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극단주의 연구에서 반복적으로 확인되는 패턴이 있다. 폐쇄와 차단은 해당 집단에게 '박해받는다'는 서사를 제공하고, 그 서사는 집단 결속을 오히려 강화한다. 음지로 밀려난 혐오는 더 과격해지는 경향이 있다. 규제 자체가 나쁘다는 말이 아니다. 명백한 범죄 행위에 대한 법적 대응은 당연히 필요하다. 다만 플랫폼 규제가 혐오 문화의 해결책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은, 뿌리는 건드리지 않고 줄기만 자르는 것에 가깝다.


법이 감수성을 만들 수 있는가

처벌 강화 논의는 더 복잡한 지형에 있다.

비교 사례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독일은 홀로코스트 부정을 형사 처벌하는 역사부정죄(Volksverhetzung)를 운용하고 있다. 나치즘의 직접적 경험을 가진 국가로서, 역사 부정이 민주주의 자체를 위협한다는 사회적 합의 위에 세워진 법이다. 공개적인 홀로코스트 부정은 독일 사회에서 심각한 사회적·법적 제재를 받는다. 일정한 효과가 있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독일의 사례를 한국에 그대로 이식하는 것은 몇 가지 지점에서 생각을 멈추게 한다. 혐오 표현과 표현의 자유 사이의 경계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가장 다루기 어려운 법적 문제 중 하나다. 스타벅스의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는 그 자체로 불법인가? 5·18을 '폭동'이라고 부르는 것은 처벌 대상인가? 경계를 어디에 긋느냐에 따라, 법은 정치적 반대 의견의 억압 수단으로 전용될 수 있다. 국가가 역사 해석의 심판자가 되는 것은 민주주의적 원칙과 불편한 긴장 관계를 형성한다.

더 근본적인 문제는, 처벌이 1편에서 분석한 혐오의 토양을 건드리지 못한다는 데 있다. 민주화 서사의 피로, 능력주의적 분노, 온라인 증폭 장치. 이것들은 법으로 해소되지 않는다. 오히려 처벌이 강해질수록 혐오 집단의 피해의식도 강해지는 역설이 발생할 수 있다. "우리가 하는 말을 막는다"는 서사가 집단 결속의 언어가 되는 것이다.

법이 할 수 있는 것은 행위를 제한하는 것이다. 문화를 바꾸는 것, 그리고 감수성을 형성하는 것은 법의 영역 바깥에 있다.


교육이라는 답, 그러나

규제와 처벌이 충분하지 않다면, 남는 것은 교육이다. 그러나 교육을 해결책으로 제시하기 전에 먼저 물어야 할 것이 있다.

혐오 문화의 문제를 교육과 문화의 영역으로만 환원하는 것 역시 일종의 회피일 수 있다. 1편에서 분석했듯이, 영 일베 현상의 토양 중 상당 부분은 구조적 조건에서 온다. 청년 세대의 경제적 박탈, 극단적 경쟁, 사회적 이동 가능성의 소멸, 세대 간 자원의 불평등. 이 조건들이 그대로인 채로 감수성 교육만을 강조하는 것은, 불평등한 구조를 그대로 둔 채 그 구조의 피해자들에게 더 나은 인간이 되라고 요구하는 것과 얼마나 다른가.

세대 간 자원의 불평등이 해소되지 않는 한, 민주화 서사를 향한 반감은 계속 재생산될 것이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가 공정의 유일한 언어로 군림하는 한, 분노는 구조가 아닌 약자를 향할 것이다. 이것은 불편하지만 외면하기 어려운 사실이다.

그렇다고 구조 변화를 기다리며 교육을 유예할 수도 없다. 구조는 단기간에 바뀌지 않으며, 지금 이 순간에도 교실에서는 혐오 코드가 또래 언어로 정착하고 있다. 구조와 문화는 동시에 다루어야 한다는 말은 옳다. 다만 그 말이 구조적 문제를 외면하는 면피의 언어로 사용되어서는 곤란하다. 교육은 구조 변화를 대체하는 것이 아니라, 그 변화를 요구하는 시민을 길러내는 것이어야 한다.


사실을 가르치는 것과 고통을 가르치는 것

현행 역사 교육의 핵심 문제는 무엇인가.

5·18을 가르치는 방식을 생각해 보라. 교과서는 사건의 배경, 전개, 결과를 서술한다. 1980년 5월,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 광주 시민의 저항, 계엄군의 진압, 사망자 숫자. 이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사실의 전달이 감수성을 형성하지는 않는다.

독일의 홀로코스트 교육은 다른 방식으로 접근한다. 숫자보다 이름이 중심이다. 600만 명이라는 숫자는 추상이다. 그러나 안네 프랑크(Anne Frank)라는 한 소녀의 일기는 구체적 인간이다. 독일 학생들은 홀로코스트 생존자를 직접 만나고, 수용소를 방문하며, 피해자 개인의 삶을 추적한다. 역사는 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이야기로 가르쳐진다.

한국의 5·18 교육에서 우리는 몇 명의 이름을 가르치는가. 윤상원, 박관현, 전옥주. 이 이름들이 교실에서 얼마나 구체적인 인간으로 살아 있는가. 계엄군의 총에 쓰러진 열여섯 살 학생이 그날 아침 무엇을 먹었는지, 어떤 꿈을 가지고 있었는지. 그 이야기가 교실에서 얼마나 전달되는가.

사실의 암기는 시험을 통과시킨다. 그러나 감수성은 사실의 암기로 형성되지 않는다. 감수성은 구체적 인간의 고통과 자신을 연결하는 경험을 통해 자란다. 역사 교육이 이 방향으로 전환되지 않는 한, 5·18은 시험에 나오는 연도와 사건명으로만 존재할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 끝나면, 그것은 조롱의 소재가 될 수 있는 빈 기호로 남는다.


교사는 왜 말할 수 없는가

교실이 혐오 코드의 전파지가 되고 있다는 현실 앞에서 흔히 제기되는 반응이 있다. 교사가 제대로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 비판은 결정적인 질문 하나를 건너뛴다. 교사는 왜 말하지 않는가가 아니라, 교사는 왜 말할 수 없는가를 먼저 물어야 한다.

한국의 공립학교 교사는 공무원이다. 국가공무원법은 공무원의 정치 운동을 금지하고, 정당법은 교원의 정당 가입을 금지한다. 이 법적 구조 안에서 교사가 수업 중 시사적 쟁점에 대해 발언하는 것은 언제든 '정치적 편향'이라는 민원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스타벅스 사태처럼 지금 이 순간 사회에서 진행 중인 정치적 논란, 혐오 표현을 둘러싼 논쟁, 역사 조롱의 맥락을 교실에서 구체적으로 다루는 것이 교사에게는 잠재적 위험 행위가 된다. 학부모 한 명의 민원이 제기되면 교사는 소명해야 하고, 관리자는 압박을 받는다. 이 구조 안에서 교사의 침묵은 무능이 아니라 생존이다.

이것은 개별 교사의 용기나 의지의 문제가 아니다.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교사에게 시민 교육을 요구하는 것은, 손발을 묶어놓고 헤엄치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더 깊이 들어가 보면,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 박탈은 단순한 제도적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사를 시민이 아니라 국가 교육 정책의 전달자로 규정하는 세계관의 산물이다. 교사가 스스로 세계에 대해 발언하는 시민일 때, 그는 학생들에게 세계에 대해 발언하는 방법을 몸으로 보여줄 수 있다. 발언을 금지당한 교사의 교실은, 살아 있는 사유의 공간이 아니라 정해진 내용을 전달하는 공간으로 위축된다. 그 위축된 교실에서 비판적 시민이 자라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얼마나 현실적인가.

독일, 핀란드, 덴마크 등에서 민주주의 교육이 실질적으로 작동하는 공통된 배경이 있다. 교사가 사회적으로 존중받는 전문가이면서, 동시에 정치적 발언권을 가진 시민이라는 것이다. 핀란드 교사는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정치적 의견을 공개적으로 표명하며, 교실에서 논쟁적 사안을 다룰 수 있는 전문적 자율성을 보장받는다. 이 자율성이 교실을 살아 있는 공간으로 만드는 전제 조건이다.

한국에서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 회복 논의는 오랫동안 진행되어 왔지만, 번번이 '교사의 정치화'에 대한 불안을 이유로 차단되어 왔다. 그러나 그 불안이 정작 무엇을 만들어냈는지를 돌아볼 필요가 있다. 정치적으로 무력화된 교사가 운영하는 교실에서, 학생들은 세계를 비판적으로 읽는 법을 충분히 배우지 못했다. 그 공백을 채운 것이 온라인 커뮤니티였고, 알고리즘이 추천하는 혐오 콘텐츠였다. 교사의 입을 막은 결과가 지금 우리가 목격하는 교실의 풍경이라면, 그 인과를 어떻게 읽어야 하는가.

교실을 혐오 문화의 대안 공간으로 만들기 위한 조건은, 교사에게 더 많은 책임을 부과하는 데 있지 않다. 교사가 시민으로서 발언할 수 있는 권리를 회복하는 데 있다. 교사의 정치적 기본권은 교사만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교실이 민주주의를 실천하는 공간이 될 수 있는가의 문제이고, 궁극적으로 어떤 시민을 길러낼 것인가의 문제다.


생각하지 않는 것의 위험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아이히만(Adolf Eichmann) 재판을 지켜보며 '악의 평범성(banality of evil)'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아이히만은 괴물이 아니었다. 그는 생각하지 않는 사람이었다. 자신이 처리하는 서류가 수백만 인간의 죽음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지 못하거나, 느끼려 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아렌트의 경고는 이것이 예외적 악인의 특성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춘 평범한 인간 누구에게나 가능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를 5월 18일 탱크 행사에 붙이면서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면,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나쁜 사람이어서가 아닐 가능성이 높다. 그들은 생각하지 않은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기획이 누군가의 고통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느끼지 못하거나, 느끼려 하지 않은 사람들. 이 '느끼지 않음'은 타고난 것인가, 아니면 형성된 것인가. 그리고 형성된 것이라면, 다르게 형성될 수 있는가.

이 질문이 교육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지점이다. 감수성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구체적인 인간의 이야기를 듣고,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고, 그 자리에서 세계를 바라보는 반복적 경험을 통해 형성된다. 역사를 가르치는 것은 과거를 암기시키는 것이 아니다. 과거의 고통이 지금 여기의 나와 어떻게 연결되어 있는지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그 연결이 없으면, 역사는 조롱의 소재가 되거나 시험 문제가 되거나, 둘 중 하나가 된다.


마치며: 질문을 닫지 않는 것

스타벅스 사태는 이미 어느 정도 수면 아래로 가라앉고 있다. 대표이사는 해임되었고, 회장은 사과했다. 불매운동의 열기는 서서히 식을 것이고, 다음 사태가 올 것이다. 다른 기업에서, 다른 형태로, 다른 날짜에.

이 반복을 끊을 단일한 해법은 없다. 규제는 행위를 제한할 수 있지만 감수성을 만들지는 못한다. 처벌은 두려움을 줄 수 있지만 공감을 가르치지는 못한다. 구조의 변화는 분노의 토양을 줄일 수 있지만, 그것만으로 타인의 고통을 느끼는 능력이 저절로 생기지는 않는다. 역사 교육의 전환, 교사의 시민적 권리 회복, 구조적 불평등의 해소. 이것들은 각각으로는 충분하지 않고, 동시에 작동할 때 비로소 의미를 갖는다. 그리고 그 어느 것도 단기간에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어쩌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불편함을 유지하는 것일지 모른다. 사태가 진정된 후에도 질문을 놓지 않는 것. 저 기획자는 어디서 저 감각을 얻었는가. 그 감각은 어떻게 형성되었는가. 그리고 그 감각이 형성되도록 방치한 사회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민주주의는 투표함 안에만 있지 않다. 그것은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 앞에서 누군가가 멈추는 능력 안에도 있다. 그 멈춤이 어디서 오는지를 묻는 것, 그리고 그 답을 쉽게 닫지 않는 것. 그것이 지금 이 사태가 우리에게 남긴 숙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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