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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타벅스 사태로 바라본 한국의 혐오문화-1편

교육&철학

by by Noma 2026. 5. 25. 0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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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며: 실수라고 하기엔 너무 정교했다

2026년 5월 18일, 스타벅스코리아는 '탱크데이' 이벤트를 진행했다. 5·18 민주화운동 46주년 당일이었다. 홍보 문구는 "책상에 탁!"이었다. 탱크 텀블러를 할인 판매하는 행사였다.

논란이 즉각 터졌다. "책상에 탁 치니 억하고 죽었다"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발표문, 그리고 5·18 당시 광주 시내로 진입한 계엄군의 탱크. 이 두 가지가 5월 18일이라는 날짜와 결합했을 때, 이것을 우연이라고 볼 수 있는가. 스타벅스는 사과했고 대표이사는 해임되었다. 그러나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많은 사람들이 느낀 불편함의 핵심은 기업의 무능이나 부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다른 질문을 향하고 있었다. 저 기획을 통과시킨 사람들의 감각은 어디서 형성되었는가.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를 5월 18일 탱크 행사에 붙이면서 아무도 이상하다고 느끼지 않았다면, 그 감각의 부재는 어디서 왔는가. 이것은 한 기업의 문제가 아니다. 그 기획자들을 만들어낸 사회의 문제다.


'영 일베'란 무엇인가: 이념 없는 혐오의 등장

일간베스트저장소, 이른바 일베(ilbe)는 2010년대 초반 한국 온라인 문화의 가장 논쟁적인 공간으로 부상했다. 5·18 민주화운동을 '폭동'으로 규정하고, 민주화 운동의 희생자들을 조롱하며, 여성과 지역을 향한 혐오 표현을 생산하는 공간이었다. 이 시기의 일베는 적어도 명시적인 이념을 갖고 있었다. 반호남, 반여성, 반진보라는 정치적 지향이 비교적 선명했다.

'영 일베(Young 일베)'는 다르다. 이들은 일베라는 커뮤니티의 회원이 아닌 경우가 많다. 일베의 정치적 역사나 이념적 맥락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일베에서 생산된 언어와 밈, 조롱의 코드를 자신의 일상적 언어로 사용한다. '노'(노무현 전 대통령을 비하하는 표현)라는 글자만 나와도 웃고, 5·18을 언급하는 맥락에서 특정 단어를 삽입하며, 민주화 운동의 상징적 인물들의 죽음을 소재로 한 밈을 공유한다.

이것이 기존 일베보다 더 다루기 어려운 이유가 있다. 이념은 논박할 수 있다. 주장은 반박할 수 있다. 그러나 코드는 논박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그냥 웃자고 한 말"이라는 한마디로 모든 책임이 해소된다. 혐오가 이념의 언어를 벗고 놀이의 언어를 입었을 때, 그것은 훨씬 더 광범위하게 퍼지고 훨씬 더 잡기 어려워진다.

핵심은 소속감이다. 일베식 코드를 아는 것, 그것을 적재적소에 사용하는 것, 그리고 같은 코드를 알아보는 상대와 눈빛을 교환하는 것. 이 과정 전체가 하나의 집단적 정체성을 구성한다. 혐오는 내용이 아니라 형식으로 기능한다. 무엇을 혐오하느냐보다 어떻게 혐오하느냐가 집단의 언어를 규정한다.


토양 1: 민주화 서사의 피로와 세대 간 균열

혐오 문화의 토양을 이해하려면, 그것이 자라난 세대적 조건을 먼저 살펴야 한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청년기를 보낸 세대에게 민주화는 자신들이 몸으로 싸워 쟁취한 역사다. 5·18, 6월 항쟁, 노동운동. 이 역사는 그들에게 살아 있는 기억이자 정체성의 일부다. 그리고 이 세대는 그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려 했다. 교육을 통해, 기념식을 통해, 문화를 통해.

문제는 전달 방식에 있었다. 민주화 세대가 자신의 역사를 다음 세대에게 전달하는 방식은 종종 '훈장 소환'의 형태를 띠었다. 우리가 얼마나 희생했는가, 우리가 이 민주주의를 어떻게 만들었는가. 이 서사는 감사와 계승을 요구했다. 그러나 그 요구를 받는 세대의 현실은 달랐다.

오늘날 20대는 사상 최고 수준의 청년 실업률과 주거 불안, 극단적 입시 경쟁 속에 있다. 민주화의 제도적 과실, 즉 안정된 일자리, 저렴한 주택, 복지 체계는 기성세대가 이미 점유하고 있다. 청년 세대는 민주주의라는 성과를 물려받았다고 들었지만, 자신들의 삶에서 그 성과를 체감하기 어렵다. 이 조건에서 민주화 서사는 감동이 아니라 피로로 수신된다. 심할 경우, 자신들의 현재 고통을 외면하면서 과거의 영광만 반복하는 기성세대의 자기 정당화로 읽힌다.

이 균열이 혐오의 첫 번째 토양이다. 민주화 서사에 대한 반감이 역사적 사건 자체에 대한 조롱으로 표출될 때, 그것은 단순한 무지나 악의가 아니다. 그것은 자신의 고통을 외면당했다고 느끼는 세대의 뒤틀린 항의다. 이것을 이해하지 못하면, 혐오에 대한 대응은 언제나 표면만 건드리게 된다.


토양 2: 능력주의의 역설 — 공정이 혐오의 면죄부가 되다

두 번째 토양은 능력주의(meritocracy)다.

오늘날 한국 청년 세대가 가장 민감하게 반응하는 가치는 '공정'이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아야 한다, 특혜와 반칙은 용납할 수 없다, 기회는 균등해야 한다. 이 가치 자체는 정당하다. 문제는 이 공정의 감각이 어떤 방향으로 작동하는가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는 성공을 개인의 능력과 노력의 결과로, 실패를 개인의 무능과 나태의 결과로 설명한다. 이 논리 안에서 구조적 불평등은 사라진다. 가난한 사람이 가난한 것은 그가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며, 성공한 사람이 성공한 것은 그가 더 뛰어나기 때문이다. 이 세계관에서 약자에 대한 연대는 '공정'을 위반하는 것이 된다. 여성 할당제는 역차별이고, 장애인 편의시설은 특혜며, 이주민 지원은 역차별이다.

여기서 혐오가 자라난다. 경쟁에서 패배했거나 패배할 것을 두려워하는 분노는 구조를 향하지 않는다. 능력주의 이데올로기 안에서 구조는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그 분노는 대신 자신보다 '불공정한 혜택'을 받는다고 여겨지는 집단을 향한다. 여성, 호남, 장애인, 이주민. 이들은 능력주의 서사 안에서 '공정한 경쟁을 방해하는 집단'으로 호명된다.

5·18을 조롱하는 것도 이 논리와 무관하지 않다. 민주화 운동의 피해자들이 국가로부터 보상을 받고, 그 역사가 교과서에 실리며, 기념일마다 공식적으로 추모된다. 능력주의적 감각으로 보면, 이것은 일종의 '특혜'처럼 느껴질 수 있다. 자신은 아무도 위로해주지 않는데, 수십 년 전의 사건 피해자들은 계속 국가의 지원을 받는다는 뒤틀린 박탈감. 이것이 역사 조롱의 심리적 기제 중 하나다.

마이클 샌델(Michael Sandel)은 『공정하다는 착각(The Tyranny of Merit)』(2020)에서 능력주의가 성공한 자들에게는 오만을, 실패한 자들에게는 굴욕을 생산한다고 논증했다. 한국 사회는 이 논증이 가장 첨예하게 현실화된 사례 중 하나다. 능력주의가 공정의 언어를 쓰면서 혐오의 면죄부를 제공하는 구조, 이것이 영 일베 현상의 두 번째 토양이다.


토양 3: 온라인 커뮤니티의 감정 증폭 장치

세 번째 토양은 기술적·플랫폼적 조건이다.

온라인 커뮤니티는 단순한 소통 공간이 아니다. 그것은 특정 감정과 세계관을 선별하고 증폭하는 장치다. 알고리즘은 이용자가 오래 머무는 콘텐츠를 우선 노출한다. 분노, 혐오, 조롱은 중립적 정보보다 훨씬 강한 감정 반응을 유발하며, 따라서 체류 시간을 늘린다. 알고리즘은 가치 중립적이지 않다. 그것은 구조적으로 혐오 콘텐츠를 선호한다.

커뮤니티 내부의 동학도 중요하다. 조롱과 혐오 표현은 '베스트 글'에 오르는 가장 빠른 방법이다. 웃음과 공감을 유발하는 밈은 빠르게 공유되고,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은 커뮤니티 내에서 지위를 획득한다. 이 구조에서 혐오 표현의 생산은 단순한 악의가 아니라 사회적 보상을 추구하는 행위가 된다. 혐오는 인정 욕구와 결합한다.

더 심각한 것은 오프라인으로의 전파 경로다. 교실이 그 핵심 공간이다. 청소년들은 온라인에서 습득한 일베식 코드를 교실에서 사용한다. '노'라는 글자만 나와도 웃음이 터지는 교실, 5·18을 언급하면 특정 반응이 나오는 집단적 분위기. 이것이 교사의 보고서가 아니라 교사들이 일상적으로 경험하는 현실이다. 군대도 마찬가지다. 집단생활 공간은 이 코드가 가장 빠르게 정상화되는 곳이다.

이 과정에서 혐오 코드는 성격이 바뀐다. 처음에는 온라인 커뮤니티의 특수한 언어였던 것이, 교실과 군대를 거치면서 또래 문화의 일부가 된다. 그리고 또래 문화가 된 혐오 코드는 더 이상 '일베 언어'로 인식되지 않는다. 그냥 '우리끼리 쓰는 말'이 된다. 탈맥락화와 정상화, 이것이 영 일베 현상의 가장 위험한 측면이다.


핵심 메커니즘: 혐오는 왜 '놀이'의 언어를 입는가

이 모든 토양 위에서 작동하는 핵심 메커니즘이 있다. 혐오가 놀이의 형식을 취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전략이다. 의식적인 전략일 수도 있고, 집단적으로 진화한 무의식적 전략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 효과는 분명하다. 놀이의 형식은 혐오에 면책 구조를 제공한다.

"책상에 탁!"이라는 문구를 5월 18일 탱크 행사에 사용한 기획자가 의도를 추궁당할 때, 가능한 대답은 두 가지다. "몰랐다"와 "그냥 재미있을 것 같았다". 두 대답 모두 처벌을 회피하는 언어다. 전자는 무지를, 후자는 유희를 내세운다. 이것이 부인 가능성(deniability)의 구조다.

혐오 코드를 아는 사람에게는 메시지가 전달된다. 모르는 사람에게는 그냥 텀블러 할인 행사처럼 보인다. 이 이중성이 핵심이다. 혐오 표현은 내부자에게는 신호로, 외부자에게는 무해한 것으로 기능하도록 설계된다. '알 사람은 안다'는 구조다.

이 구조는 혐오를 방어하기 매우 어렵게 만든다. 의도를 증명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법적으로도, 도덕적으로도, 교육적으로도. 웃자고 한 말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사람이 오히려 '예민한 사람', '유머를 모르는 사람'으로 역공당한다. 피해자와 비판자가 방어적 위치에 서게 되는 구조, 이것이 혐오의 놀이화가 가진 가장 정교한 폭력성이다.

스타벅스 사태는 이 구조의 교과서적 사례다. 의도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는 영원히 확정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의도의 확정 여부와 무관하게, 저 문구가 탄생하고 통과될 수 있었던 감각적 토양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 토양이 문제다.


마치며: 이 땅에서 혐오는 계속 자란다

영 일베 현상은 일탈이 아니다. 그것은 한국 사회의 구조적 조건이 만들어낸 필연적 산물에 가깝다. 민주화 서사의 피로, 능력주의가 생산한 분노, 온라인 플랫폼의 증폭 장치, 그리고 놀이의 언어로 포장된 면책 구조. 이 네 가지가 결합할 때, 혐오는 이념도 아니고 신념도 아닌 문화가 된다. 문화가 된 혐오는 논박으로 사라지지 않는다.

그렇다면 무엇이 가능한가. 사이트를 폐쇄하면 되는가. 처벌을 강화하면 되는가. 아니면 교육을 바꾸면 되는가.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은 단순하지 않다. 그리고 그 단순하지 않음을 정직하게 다루는 것이 2편의 과제다.

스타벅스 사태가 불편한 이유는 기업 하나의 실수 때문이 아니다. 그것이 우리 사회의 감수성이 어디까지 무너졌는지를 보여주는 거울이기 때문이다. 그 거울을 똑바로 보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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